월드컵 난중 일기
0/영웅이 없는 시대는 난세다. 아니, 난세는 늘 영웅을 필요로 한다. zizou를 외치는 프랑스 시민들의 목소리가 샹제리제를 메우던 지난 토요일 밤, 나는 스스로의 노쇠함, 국가대표 축구팀의 노쇠함보다 더한 노쇠함에 무기력해진 프랑스 사회가 진정 난세임을 실감했다. 더구나 난세는 기적을 갈구한다. 미디어는 기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합하여 이제 아름다운 은퇴라는 수식어를 조금 지나치게 난발하며 쇼를 준비하는 중이다. 지단의 투혼, 아름다운 은퇴.  

1/2003년 이라크 전 발발을 앞두고 이에 강력히 반발하던 독일과 프랑스를 일컬어 미국 정부는 "늙은 대륙"이라 칭한 바 있다. 지난 봄 대규모 수업거부와 파업 시위 사태를 촉발한 "최초 고용제도"를 제안한 빌팽 총리는 당시 프랑스 외부부 장관이었고 "늙은 대륙"이라는 미국의 비아냥에 "우리는 비록 노쇠하였으나 지혜롭다"고 응수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을 끝내 일으켰고, 도덕적 책무의 겉옷과 실리적 계산의 속옷을 걸치고 이에 항의하던 프랑스는 노장의 지혜나 웅변이 세계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높은 실업율, 이민자 통합 문제, 사회복지 모델의 적합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자유주의 모델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는 고비용 저효율의 경제 정책. 지난 몇 해 동안 내가 경험한 프랑스는 이 모든 문제들로 전전긍긍하며 상징적인 사건들을 체험해오고 있었다. 2003년 봄 연금제도 개혁과 교육 제도 개혁에 대한 대규모 시위 및 파업 사태는 사회모델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2003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대규모 노약자사망 사태 역시 노인화 된 사회의 어떤 징후들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2005년 봄 이민자 문제 및 자유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 헌법 부결이라는 사태로 나타났고 2005년 이민자 자녀들 및 소외 청년들의 폭력 사태는 다시 전 세계 뉴스시간에 프랑스의 오늘을 전하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2/2006년 월드컵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상징이자 징후이며 소원이고 위로이다. "늙은 수탉"이라는 비아냥을 받던 프랑스 팀은 늙은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던 시절, 이미 적극적인 귀화 정책으로 아랍 이민자 출신들이나 아프리카계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던 프랑스는 당시 우파 세력에게 "르 마르세이유도 모르는 이들에게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힌다"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우승을 이끈 별은 지단이었고 지단은 특히나 알제리 이민자 출신 가정의 자녀였다.  프랑스 역사의 가장 큰 오점은 바로 알제리 식민 정치와 학살이고, 프랑스 극우파 세력의 중심을 형성하는 이들은 대게 알제리 식민 통치 지배 세력의 후손이라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 따라서 프랑스의 98년 월드컵 우승은 우파 세력의 비판을 잠재우고 이민자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프랑스 사회를 기쁨으로 통합하는데 일조했다.


프랑스가 브라질을 이기던 날 길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 나왔다. 신문은 백인, 흑인, 아랍계들이 어울려 함께 열광하는 사진을 게재한다. 알제리계 이민자들이 차에 알제리 국기를 달고 도시를 질주한다. 세네갈 출신 파트릭, 모로코 출신 장 마리- 중요한 것은 내 몸에 흐르는 핏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프랑스 시민 이라는 것. 인종주의와 극우주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저항과 반대는 인도주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이 땅에서 이 땅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프랑스 시민'은  인종에 상관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에서 보호받고 열광할 수 있다는 것. 

"프랑스가 아프리카에 있나"고 객적은 소리를 하는 포탈 싸이트 게시판의 글들을 보자 한국의 순혈주의가 지닌 보수성이 느껴져 울화가 치밀었다. 독일팀의 새로운 칼라에 열광하면서도 독일이 준결승정도에서 멈추어주길 바라던 조바심의 기원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경기장을 누비는 훤칠한 게르만들에다 하나가 되어 독일 국기를 흔드는 독일 사람들의 모습이 사뭇 두려웠다.


3/같은 날 르몽드지에는 프랑스 경시청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 체류 외국인 자녀의 추방"문제에 대한 입장을 문는 인터뷰. "왜 프랑스 만이 열린 국경을 가져야 하는 나라인가. 프랑스는 법치 국가다"라고 주장하는 사르코지 내무 장관의 측극 변호사 발언도 함께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이민법 개정과 함께 불법 체류자 자녀들을 학교에서 제명한다는 소식은 지난 해부터 많은 단체들의 반발을 받아왔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냥"이라는 비판 여론 속에서 사르코지는 '일부 가족의 구제'를 천명했고, 이번 여름 방학 기간 동안 강제 추방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프랑스 팀의 4강 승리 다음 날 19세의 알제리계 고등학생이 불법 체류라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축구장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이 '늙어가는'사회는 여전히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고, 사람들이 축구를 보는 동안 신음 소리는 환호성에 잠시 조용히 묻혀질 뿐이다.



4/ 그러나 나는 지단을 사랑한다. 나는 지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by 키위 | 2006/07/08 09:59 | 먼 곳에서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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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inny at 2006/07/08 11:43
글 잘 읽었어요. 지단이 알제리 출신이었군요. 밑에서 두번째 사진. 참 멋있네요. :)
Commented by 부드러운흔적 at 2006/07/08 17:19
축구란 단순히 스포츠 차원의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 민족적 의미를 지닌 어떤 것이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북 아프리카 출신의 유럽 혈통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알제리 출신을 pied noir라고 한다지요? 카뮈가 가장 유명한 pied noir이고 지단도 그렇다지요? pied noir란 이름이 타당하게 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떤 기사를 보니 카뮈는 폐결핵 발병으로 그만 둘 때까지 축구를 했다는데 "내가 예상한 쪽으로 공이 오는 적은 없었다"는 말을 했고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축구는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진정한 통합을 이루어낼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Commented by 민영 at 2006/07/08 22:56
으헝 제가 좋아하던 팀은 다 졌어요 -_- 다 프랑스에게.
프랑스 팀은 이상하게 정이 안가더군요. 사진의 지단은 참 멋있네요 ㅋㅋ
Commented by deli21 at 2006/07/10 00:53
저도 지단을 사랑합니다. 저는 리피 감독이 이끄는 2006년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의 플레이를 존경합니다만(아주리 군단의 승리를 예상하지만), 지단의 활약을 보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는 그의 모습을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두 눈 똑똑히 뜨고 차돌백이 씹 듯 이리저리 돌려서 맛나게 되새김질 하며 '시청할' 계획입니다.
Commented by 키위 at 2006/07/11 00:53
지단 사진은 얼마 전 개봉한 다큐 영화 "지단, 21세기의 초상"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현대 미술 작가 두 명이 지단의 경기를 촬영 9개월간의 몽타쥬 끝에 완성한 영화라네요.

2002년 극우파의 대통령 선거 결선행이라는 홍역을 치룬 프랑스는 그 일로 큰 상처를 안게 된 듯 해요. 이 번 다인종 국가 대표팀, 그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 노쇠한 세대의 경기가 사회에 가져온 흥분은 98년 우승 당시와 사뭇 다른 듯 해요. 우승을 못하고 준우승에 머문 것 까지 뭔가 의미심장한 데가 있는 것만 같아요.

은퇴 오분 전에 퇴장 당한 지단은 온전한 영웅으로 남기 보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았군요. 프랑스 감독은 경기 끝나기 오분 전에 지단이 진정한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도록 교체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슬프다더군요. 그런 방식으로 영웅의 경력을 마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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