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 로마에서 뉴욕까지
1.주말의 극장

 추억의 영화, 명화 극장. 나는 텔레비젼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거의 시청해본 적이 없다. 농담에 능한 우리 아버지는 또 한편 권위주의적인 가장이어서 텔레비젼 선택권은 늘상 아버지에게 있었고, 아버지는 영화를 싫어했다. 아버지는 베스트셀러 극장이나 TV문학관을 좋아했다. 나는 "낙지 같은 여자 이야기"같은 베스트셀러 극장 불후의 단편들을 어슴프레 기억한다. 그렇제만, 내가 텔레비젼을 통해 보고, 무엇인가 감동을 한 결과 나름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란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장난"과 오드리 헵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이 전부인가 싶다. 로마의 휴일은 초등학교때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듯 싶다. 아버지는 "영화란 이런 거야"라고 이야기하듯 한껏 흡족해하며 영화를 보았는데, 그레고리 펙이며 오드리 헵번은 그토록 영화에 무심한 우리 아버지의 마음까지 흔들만큼 매력있었던 것이다. 로마 시내를 누비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오드리 헵번은 시대와 국경을 뛰어 넘어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가 있었던가 보다. 그런데 사람들을 사로 잡은 것이 다만 오드리 헵번이었던가 하면 그것만은 아니다. 오드리 헵번이 동전을 던지던 트라비아 분수대며 발바닥을 아프게 할 로마의 풍경들이 우리를 잡아 끌었던게다.

2. 로마

나는 한번도 로마에 가보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을 가보았지만 로마는 가 보지 못했다. 파리나 로마는 역사와 낭만의 신화가 겹겹이 덧 씌워진 도시라 가볍게 스쳐가는 것이 부담스럽다. 로마는 아름다울까, 얼마나 낭만적일까, 로마는 오래된 돌 무더기 사이에서 오늘을 살고 있을까. 얼마 전 극장에서 본 이탈리아의 거장 펠리니의 영화 " 펠리니/로마"는 로마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과 미련에 대한 거장의 응수다. 펠리니는 로마에 대한 온갖 고전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붕괴 내지는 충돌을 보여주는 영화적인 실험을 한다. 그는  이런 저런 시간을 오가지만 주되게는 파시스트 지배기를 밑그림으로 한다.  세계 대전 당시 로마의 대중 극장들의 풍경, 전후 비루한 아파트의 퇴락하고 시끌 벅적한 풍경, 사창가에 몰려다니는 젊은 군인들을 보여준다. 다시 논리적인 연결 없이 이 이어 붙여진 또 다른 풍경들 - 로마 분수대를 점령한 70년대의 히피들, 바티칸의 성직자들, 교통 체증, 수천년의 유적지를 관통하는 지하철 공사장이 있다.  수십명이 한 아파트에서 엉겨 붙어 하숙을 하고,  광장에서 거나하게 음식을 먹는 현대 로마인의 풍경, 고답적인 로마에 대한 부르조아들의 동경,  이 모든 것은 시끌 벅적하다. 샤갈의 그림처럼 살포롯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펠리니의 이미지를 몽환적이라고 칭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쫓아가려는 어떤 강박도 없는 거장 펠리니의 페스티발같은 로마 횡단기, 그래서 오드리 헵번의 로마는 다른 옷을 입었다.

3. 오드리 헵번


그렇지만 오드리 헵번은 또한 오드리 헵번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 (불어 제목은 '쇼파위의 다이아몬드') , 뉴욕 사교계의 잘 나가는 요정 오드리 헵번은 요란스러운 밤을 보내고 새벽 택시에서 내린다. 인적 없는 길가, 호화 보석상 "티파니"  진열장 앞에서 빵을 뜯어 먹으면서 진열장을 바라보는 오드리헵번.

1961년 영화인 이 영화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저 진열장 안의 번쩍이는 보석들을 사줄 남편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한 뉴요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열흘쯤 전인가 이 유명한 영화를 이제서야 밀라노에 가기 전날 복원된 카피본으로 소르본 뒤 사설 시네마테크에서 보았다.) 제도를 벗어나고픈 공주의 욕망을 우아하게 충족시켜주고 모든 사람을 제 자리로 돌려 놓은 "로마의 휴일"의 적젏한 로맨스에 비추어볼 때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은 훨씬 씁쓸한 로맨스다. 이 영화의 원작이 헐리우드의 문제적 작가 트루만 카포티라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도 없다. 그러나 원작은 이 영화보다 훨씬 음울하고 데카당해 보인다. 허영심 많은 콜걸의 이야기였던 원작을 감독 에즈워드 블레이크와 제작자 파라마운트는 관객들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페이소스만 남기고 뒤 바꾸었다.

팔려가듯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던 할리는 뉴욕으로 도망쳐 온다. 전후 성장기의 뉴욕, 작은 아파트에 사는 할리는 속절없고 미래 없는 남자들과 밀고 당기는 파티의 밤을 보내고 몸과 마음이 피곤할 때 보석상 티파니의 진열장을 구경하러 온다.  택시에서 내리는 오드리 헵번의 뒷 모습, 투명하지만 단단한 저 비투과성의 유리창 앞에서 커다란 눈의 오드리 헵번은 고개를 가만히 기울인다.  카메라는 저쪽 세계, 즉 보석 상 안에서 저 밖에 선 할리를 비춘다.  예쁜 오드리 헵번의 간절한 소망을 엿 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할리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백마 탄 왕자는 쉽게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별 볼일 없는 사람이거나 뜨거운 마음이 없는 한량이거나 놈팽이다. 윗집에 사는 작가는 부자집 마나님의 기둥서방이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기존의 행복한 로맨스 영화들에 비해 지나치게 세속적이라고 거부감을 느낀다. 영화엔 "기둥서방이지만 작가인 이웃 총각을 이해하려고 파티 걸 할리가 시립 도서관에서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낭만적인 설정에서 "당신은 내게 어울리는 여성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범죄에 연루된 할리를 떠나는 멕시코 유력가문 사내의 현실적 입장이나, "나는 그래도 그를 쫓아 가겠다, 공항"을 외치는 도도한 할리까지 충돌하는 세계가 공존한다. 이 쌉싸름하고 저속한 욕망들을 기어이 봉합해내는 것은 오드리 헵번의 생기넘치는 매력이다. 그녀는 결코 저속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싱크대 위에 성큼 성큼 올라가고, 고양이를 비 오는 길거리로 집어 던진다. 그런데도 그녀는 순진함 속에 모든 것을 괄호 쳐 넣는 여인의 이미지에도, 히스테리로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내는 여인의 이미지에도 닮아있지 않다. 그래서 이 저속함의 한 가운데, 뉴욕의 지붕 아래에서 그녀는 티파니를 꿈꾸는 허영 덩어리이면서도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줄 것만 같은 여인으로 남아있다.   
by 키위 | 2007/05/11 06:55 | 오늘의 cinema | 트랙백(2)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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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이오공감의 흔적 at 2007/05/11 11:49

제목 : 2007년 5월 11일 이오공감
수업을 듣다가 감동을 받기란 쉽지 않은데  by skywalker수업 듣다가 마지막에 이 슬라이드가 나왔는데 눈물날 뻔 했습니다. 학교에서 수업 듣다가 감동받기란 사살 쉽지 않은데 이 사진 보고 갑자기 왜 그렇게...오드리 헵번 : 로마에서 뉴욕까지  by 키위추억의 영화, 명화 극장. 나는 텔레비젼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거의 시청해본 적이 없다. 농담에 능한 우리 아버지는 또 한편 권위주의적인 가장이어서 텔레비젼 선택권은 ...배움이란  by ......more

Tracked from 진화하는 영혼 at 2007/05/11 22:54

제목 : 왕과 나, 아버지와 나.
오드리 헵번 : 로마에서 뉴욕까지그 시절에는 극장에 간다거나 하는걸 몰랐고 비디오는 왠지 정이 가지 않아 영화라고는주말의 명화가 전부였던 시절. 그러나 그 시절에 본 영화들 중에서는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는명작들이 많았지. 마지막 황제라든가, 콰이강의 다리..집에서 약주드시는 것이 삶의 낙이셨던 아버지에게 영화란 참 생소해보였지만그는 나름대로 영화를 잘 보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생전에 물어본적이 없어서 확인은못하겠다만서도.여름은 아니었고, 아......more

Commented by 기니만 at 2007/05/11 12:16
버x킹의 그 광고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패러디 였군요..(오마쥬인가..)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5/11 13:02
제 아버님은 영화를 좋아하셔서 늘 같이 영화를 보던 추억이 있습니다.
특히 게리 쿠퍼를 좋아하셨어요.
남자가 여자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쫓아가거나,
반대로 여자를 위해 냉정하게 떠나는 장면에서는
'너도 저런 남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고를 하셨죠.

여담입니다만, [사인펠드]에서 독서모임에 참석한 조지는 카포티의 소설을 읽기 귀찮아서, 영화만 본 다음 '폴이 할리와 키스하는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폴은 게이인 데요'라는 장면이 떠올라요.
Commented by 키위 at 2007/05/11 18:39
기니만/ 모모킹의 광고가 그런 것인가요? 궁금하여라. 이 동네에는 모모킹이 없답니다.

marlow/ 아버님의 충고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네요. 하하. 그리고보면 저희 아버지는 평생 어떤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하신 적이 없는데, '인생의 길'을 이야기하는 자세란 일단 조금은 '낭만적인 태도'에서 시작되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걸요. '사인펠트'는 모르는 작품인데, 재미있나요? :)
Commented by 책벌레 at 2007/05/11 22:38
어릴적 티비에서 폭풍의 언덕과 동방불패가 같은 시간에 한 적이 있죠..덕분에 동생과 논쟁이 붙자, 삼촌이 그러시더군요..한놈은 양놈것 좋아학고, 한 놈은 되놈것 좋아한다고요..^^님의 영화평론을 읽으면서 회상한 추억입니다...
Commented by 워니홍 at 2007/05/11 23:49
이오공감에서 왔습니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은 이라는 작품은 확실히 씁쓸한 로맨스이지요. 그것을 감당할수 있게 해주는 오드리 햅번이라는 여배우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Commented by mintcondtn at 2007/05/12 00:51
앗 이오공감 오르셨네요 추카추카요~ ^^

저희집에서도 베스트셀러 극장 TV문학관 젤 좋아하는 쇼였어요 ㅎㅎ
"티파니에서 아침"에 할리는 그당시로서는 파격적이게 게이로 공개(?)된 삶을 살았던 인기 작가 커포티 자신의 모습인것도 같아요 그분 삶도 알고보면 화려하지만 공허한듯한 느낌이거든요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
Commented by marlowe at 2007/05/12 07:41
[Seinfeld] (1989~1998)는 인기 시트콤이예요.
제리, 죠지, 일레인, 크래머라는 네 명의 뉴요커가 벌이는 소동인 데, 무척 웃겨요.
Commented by 키위 at 2007/05/12 23:40
그리고 보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할리는 진실된 사랑을 선택하는게 아니예요. 그는 마지막까지도 돈 많은 라티노를 선택했지만, 막판에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걸 깨닫는 것 뿐인듯해요. 작가에게 돌아 온 걸 숭고한 사랑으로 포장하지 않는게 마음에 들었지요. 오드리 헵번은 되바라진 듯 하면서도 귀엽지요?

(marlow님 귀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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