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극장
격조했습니다. 격조할 지인이 남아있나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오래 블로그를 방치해본 적은 없었더랬는데요.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는 지인에게, 똑같이 지냈다고 대답했습니다. 도서관에 가고, 극장에 가고, 가까운 곳을 쏘 다녔습니다. 여전히 파리에 있습니다. 한국은 찜통 더위라는데, 이 곳은 가끔 해가 창창 나다가도 바람이 불고 서늘한 여름입니다. 긴 팔에 스카프로 목을 둘러 매고 걸어다닙답니다.


어제 저녁에 록 허드슨이 나오는 영화를 처음으로 본 듯 싶어요.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바람에 쓴 편지". 멜로 드라마의 왕자 서크 감독의 영화 중에도 최고봉이라는데, 멜로 영화에 감정이입을 잘 못하는 터라 보러 가기 전에 조금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ㅡ 평범한 멜로 영화가 아니더군요. 양식화된 세트들은 매너리즘을 연상시키고, 카메라 앵글은 누아르 영화를 닮았습니다. 인물들의 내면적인 폭력성, 다층성은 단순화된 멜로 드라마의 구조를 보란 듯이 넘어서고 있구요. 왜 누벨 바그 평론가들과 파스빈더가 더글라스 서크를 그토록 칭송했는지 감이 퍼버벅 오더랍니다.
석유 재벌의 아들 카일이 첫 눈에 반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데, 이 남자는 평생 아버지와 친한 친구 미츠의 그늘에 가려 자기 혐오와 불안에 시달리는 알콜중독자예요. 이 남자와 결혼한 루시는 총명하고 성숙한 여인인데, 남편의 친구 미츠의 원 사이드 러브의 대상이기도 하지요. 여기에 어릴 때 부터 미츠를 사랑하는 석유 재벌의 딸 마를리, 이 아가씨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좌절한 것인지, 타고난 성격인지, 진홍색 스포츠 카를 몰고 다니며 남자들을 유혹하는데 시간을 보내요. 그러면서 미츠에게 사랑해, 사랑해 반복해서 말하는데, 완벽한 이상형 미츠는 "난 너를 여동생으로 좋아해"라고 (잔인하게) 반복하구요. 이게, 얼핏 한국 드라마의 구조랑 다르지 않은데! 당연, 멜로 드라마니까요, 그런데, 이 석유재벌 하들리 가의 어마 어마한 저택이 상징하는 그늘과 인위성, 사건의 비극성과 폭력성은 텔레비젼 드라마의 차원에선 담아낼 수 없는 지경이랍니다.
극장에 남녀 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일 앞 줄에 앉아있던 젊은 연인이 영화가 끝나자 진한 키스를 나누더군요. 마냥 낭만적인 영화는 아니었더랬는데,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대단한 영화였구나 싶었어요. 옛날에는 서크의 영화를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많았다는데, 이 영악한 시대에 서크의 영화가 눈물을 흘리게 하기는 힘들지 싶어요. 그래도, 아, 지독한, 지긋지긋한 사랑이여, 뭐 이런 감정의 폭풍이 밀려오던걸요. 재미있더라구요. 


by 키위 | 2008/07/14 01:32 | 명작 극장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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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갈림 at 2008/07/14 02:00
오랜만이시네요. 저도 요즘 포스팅 한달에 한번 할까말까 하고는 있습니다만,
간만에 포스팅 반갑습니다.~~
Commented at 2008/07/14 23: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다시다 at 2008/07/15 01:00
반갑습니다. ^^
Commented by 키위 at 2008/07/15 07:16
갈림/ 평안히 지내셨나요? 갈림님 블로그에서는 세상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더랩니다. 한국과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에, 남의 나라 이야기만 늘어 놀을 것 같은 생각에 포스팅 하기가 힘들어졌더랍니다. 폭염 시국에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인사 건네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
비공개/ 와와, 저도, 잘 기억하고 있어요. 결국 보지 못한 자코메티 전시회장 입구를 지날 때 몇 번 생각하기도 한걸요. 항상 잊지 않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다님/ 회사원 다시다님, 그 때 그 시절에는 학생이었는데..하하. 그 덥던 여름 에어콘 포스팅이 제가 본 첫 포스팅이었던가, 그건 아닌 거 같고, 갑자기 그 에어콘 포스팅이 생각나네요. 반가워요, 다시다님.
Commented by Smila at 2008/07/15 13:45
키위 님, 처음으로 인사드려요.
오래 전부터 링크해놓고 글 읽어왔는데 (양사나이 님과도 친분을 쌓진 못했지만 그 분댁에서 건너왔어요) 첫 인사는 쑥스럽기만해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업뎃이 없으셔서 이젠 블로그를 안 하시나 했는데, 새 글이 올라온 걸 보고 무척 반가왔어요. (그래놓고 답글은 또 이제서야..^^;;) 잘 지내신다는 소식에 저 혼자, 다행이다 했습니다. ^^
Commented by Eboli at 2008/07/16 10:46
그렇쟎아도 며칠전 문득 키위님 생각을 했더랬지요. 반갑습니다 :-)
Commented by 이지숙 at 2008/07/16 17:29
깔끔한 닉네임들 사이로 왠지 더 어울릴 것 같아 실명을 쓴다.
나도 가끔 들어와 보고 있었다는거. 알고 있으라고.
건강해라. 친구.
Commented by 키위 at 2008/07/17 05:28
smila/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업뎃을 반가워해주셔서 더욱 반갑습니다. 눈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스밀라인가요? 눈 대신 비만 오는 이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명작극장, 개봉관, 여행이야기는 조금씩 적어보려고 다짐을 하고 있어요. 자주 뵈어요.
eboli/와, 문득 생각하고, 마주치는...에볼리님, 잘 지내세요? 샤모니 여행가는 친구에게 십 이년 전 샤모니 여행기를 들려주면서 그 시절 배낭 여행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비엔나에서 빵 뜯어먹던 기억이...유럽축구 때문에 너무 시끄럽지는 않으셨을려나...
이지숙/지숙아, 멀리 있는 친구 잊지 않고 지내주어서 고맙다. 더운데 애는 고생 없이 잘 크고 있나. 나중에 애 보면 애가 막 말을 하겠구나. 항상처럼 씩씩하게 지내. 말 안해도 그러겠지만, :)
Commented by 물빛 at 2008/07/26 23:18
오랜만입니다...가끔 와 보았는데 오랜 침묵 끝에 올리신 새 글 날짜가 14일이니 그 사이 열흘 이상의 시간이 흐른 것이네요...
Commented by 키위 at 2008/07/29 16:48
물빛/ 빈집이나 다름 없는 곳에 가끔 들러 주셨다니, 고맙고 죄송합니다. 자주 집을 치우고, 지나는 손님들에게 인사할 채비를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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